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1세 (문단 편집) == 종교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루터파]] 제후들과 분쟁이 벌어진지 10년째인 1530년, 제국내 루터파인 5개 영방의 제후와 14개 제국도시들은 루터파 교리 선언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제출하며 자신들의 신앙이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했고 각 제후들이 영지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cuius regio, eius religio '')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러나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제국의회에선 이를 거부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기본적으로 루터파와 맞서는 입장이었지만, 1531년 독일왕 선출시에 신교도 제후들에게 지지를 얻은 바 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극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탄압책은 펴기 어려웠다. 그는 1534년에 신교도 제후였던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와 화해하여 몰수한 영지를 돌려주고 공작위 복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제후와 제국도시에도 카를 5세가 내린 루터파 제국 추방령을 유보해주었다. 사실 당시 신교도 제후들의 세력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을 제외하면 나머지 신교도 제후들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위해 과세 협조를 얻어야 할 제국 도시들 중에 신교도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원만한 성격의 페르디난트 1세는 신교도 제후들과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1546년 형 카를 5세가 16년만에 독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 카를 5세는 [[트리엔트]]에서 열리고 있던 [[트리엔트 공의회|공의회]]가 대책없이 길어지는데 실망을 느끼며 자신만의 구상대로 제국 내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고 루터파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에 대항했다. 페르디난트는 작센 선제후 가문인 [[베틴 가문]]의 방계인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작센)|모리츠]]와 동맹을 맺어서 합류했고 신교도 동맹은 세부족이라 박살이 나서 미리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와 제국추방령을 받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전 독일은 일시적으로 통일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카를 황제의 종교 강압책은 일시적으로나 통했다. 프랑스의 비밀 지원과 원래 신교도였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신교도 동맹을 복구하여 [[인스브루크]]에 있던 황제를 기습 공격했고 카를 5세는 패하여 이탈리아를 통해 도망쳤으며 트리엔트에 있던 공의회도 아작이 났다. 결국 카를 5세는 1552년 이후 독일에 다시 오지 않았고 페르디난트가 형의 뒷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형인 카를 5세는 황제이긴 하나 1521년 이후 독일의 일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일임했고 1531년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 된 후에 실질적인 독일 통치자는 페르디난트였다. 카를 5세는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제국내 신교도들에게 전혀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가톨릭 위주의 제국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의 종교 일원화 정책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고 페르디난트 1세를 인정치 않는 친 야노시파 헝가리 귀족들과도 싸우기 위해서는 신교도 제후와 제국 도시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교도 세력과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구교파 제후였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도 제국내 종교 통일 문제는 실행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았다.[* 바이에른 공작이 가톨릭으로 남은 건 신앙심이라기보단 같은 가문이던 [[팔츠 선제후국|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선제후]]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선제후직에 목말라 있었는데 성직 선제후 자리인 [[쾰른 선제후국|쾰른]],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대주교 자리 둘 중에 하나를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끊이지 않게 계속해서 배출할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카를 5세의 회유책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교도 대표인 모리츠[* 슈말칼덴 전쟁 후 [[비텐베르크]] 항복으로 종가인 에른스트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대신하여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와 [[파사우]]에서 1552년에 강화했고 제국의회를 열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파 신앙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허가되었으며 루터파 제후와 제후령에 한하여 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스페인으로 도망친 카를 5세는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1556년 퇴위를 선언했다.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카를 5세의 임기때 나온 것이지만 페르디난트가 독일왕 자격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당사자들은 3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합의했다. 각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영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할 수 있으며, 다른 교파를 따르는 신도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다른 영지로 옮길 수 있었다. 세 번째는 [[기사]]와 자유도시들은 이 결정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페르디난트의 선언이라 불린다. 1555년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은 제국에서 루터파와 가톨릭의 공존을 관리하는 정당한 법률 문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도와 [[루터파]] 신도간의 많은 갈등을 해소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 1세는 토론을 통해 종교상의 예외를 성급하게 결정지었다. 철저하게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논의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고,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 는 원칙을 지원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잠재적인 법률 문제마저도 그러했다. 또 루터파 처우는 일견 해결되었지만 제국에서 신교도 탄압은 여전했고, 새롭게 [[개혁교회|칼뱅파]]로 개종한 신교도 지역[* 대표적으로 [[팔츠 선제후국]]은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 형제 시절의 [[프리드리히 2세(팔츠)|프리드리히 2세]], [[오토 하인리히]] 때는 루터파, [[프리드리히 3세(팔츠)|프리드리히 3세]] 때는 칼뱅파였다가 [[루트비히 6세]] 때 다시 루터파로 개종했다가 [[프리드리히 4세(팔츠)|프리드리히 4세]] 때 또다시 칼뱅파로 회귀하는 등 오락가락했다.]의 법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제국 내 제국 도시들의 문제였다. 1560년대 이후 제국 내 60여개 제국 도시중 50여개는 완전히 루터파나 칼뱅파로 돌아섰고, 나머지 도시중에서도 [[레겐스부르크]] 등 2개 도시를 제외하면 신교도가 우세했는데 신교도가 우세한 도시에서는 가톨릭 교도들은 공존할수 있었으나 가톨릭 도시에서 신교도들은 도시를 떠나야 했다. 여러 복잡한 문제는 결국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